아버님. 또 한 해가 지나갑니다. 무심코 새해의 간지(干支)를 짚어 보다가 문득 놀랐습니다. 병술(丙戌)이라 했습니다. 어린 시절, 고향집 사랑방에 손님이 들면 동생과 함께 불려 내려가서 나란히 엎드리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때 손님께서 “그래, 몇 살이던고?”라고 물으시면, 아무 뜻도 모르면서 “병술생입니다.”하고 대답하던 바로 그 병술년입니다.
어느새 예순갑자(甲子)를 한 바퀴 돌아 왔다는 자각이 당혹스럽습니다. 어느 해 이맘때인들 하나씩 쌓여 가는 나이 더미를 잊기야 했겠습니까만, 이렇듯 디지털 시계의 시보판 숫자처럼 명백한 확정 앞에서는 아연(啞然)치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님, 이제는 지나간 불효에의 변명이나 유아적인 슬픔을 사뢰지는 않겠습니다. 그러기엔 제가 너무 힘겹고 다급합니다. 세태의 조류인 양 밀려드는 과제들이 하나같이 벅찬 탓입니다. 크게 외람되오나, 적지 않은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아둔한 제게 이제는 남은 시간마저 길지 않다는 각성 때문입니다.
증조부님의 학계(學契)는 연전에 마감 정리했습니다. 그간 고향의 막내 숙부께서 주관해 주셨는데 숙부마저 당신의 예정을 짐작하는 듯, 제게 상의해 왔기에 몇 분 계원들의 의향을 앞세워 파계(破契)를 결정했습니다. 남아 있는 계금(契金)으로 증조부님 산소의 석물 일체를 바꾼다기에 본가의 체면상 고제비(告祭費) 조로 조금 보탰더니 위전(位田)이 저의 명의로 넘어왔습니다.
그날 증조부님의 유택에는 하나같이 고희를 훌쩍 넘긴 원근의 옛 제자들이 하얗게 모였습니다. 저마다 갈 길 바쁜 노인네들이 이승에서의 마지막을 고하려는 듯, 수의처럼 간직해 온 도포자락을 여미면서 옛 스승의 영전에 엎드린 모습이 숙연했습니다. 그들의 등 뒤로 겹쳐지는 고향마을의 퇴락한 정경이 흡사 시대의 종막(終幕)인 양 비감스러웠습니다. 뒤이어 들이닥칠 전환의 소용돌이는 아마도 제 몫일 것만 같아서 당혹스러웠습니다.
이미 장묘의례(葬墓儀禮)가 큰일입니다. 이 나라 산야에는 더 이상의 분묘를 들일 장소가 없습니다. 선산(先山)에 몇 자리의 터가 남아 있다 해도 고향마을에는 산역(山役)을 주선할 인력이 없습니다. 아기 울음소리에 이어 초등학생마저 사라진 지 오래인 동네의, 절반도 남지 않은 가옥마다에는 기껏 당신들의 최후 행사만을 기다리는 노인 부부 아니면 외짝들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환(鰥)은 적고 과(寡)가 많으니 더욱 그러합니다. 거기에다 이제는 산소를 돌볼 후손들마저 씨가 말라 갑니다. 객지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들에게 핏줄만을 근거로 고향을 습득시키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중벌초(門中伐草)의 분위기도 옛날 같지 않습니다. 연중 단 한 차례, 각지의 피붙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앉아 서로 간의 유대와 안부를 확인하는 전래의 미풍이건만, 젊은이들에겐 생업의 부담으로만 느껴지는 모양입니다.
음력 팔월초하루로 정해져 내려오던 행사일을 팔월의 첫 일요일로 완화하기까지 했지만 그들에겐 강제로 불려나온 부역 이상의 의미는 없어 보입니다. 세상살이가 치열해진 탓이라 체념하기에는 석연치가 않습니다. 다만 고향 선산의 문중벌초마저 오래 가지 못 할 것이라는 유추만 확연할 따름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출산 문제입니다. 기껏 아들 딸 구별 없이 한 명 남짓의 자녀만을 생산합니다. 자식들 치다꺼리로 자신들의 행복 기회를 희생할 수는 없다는 이유입니다. ‘웰빙’이라는 시대의 화두 탓입니다. 물질만의 풍요를 자기들만 누리면 그만 이라는 식의 오도된 ‘잘살기’의 폐해입니다.
자신들의 대를 이을 아들조차도 있다고 행복하거나 없어서 섭섭할 것 없는 부수적 존재로만 생각합니다. 삼천 가지의 불효 중에 아들 없음이 으뜸(불효삼천 무자기일:不孝三千 無子其一)이라 했건만, 아무런 가책도 없이 불효자로 전락해 갑니다. 이러고서야 어느 가문인들 대 이음이 온전하겠습니까? 이렇게 몇 대가 내려간다면 어느 집안이 절손(絶孫)의 화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저런 연유로 하여 화장상례(火葬喪禮)가 성행하는 세태입니다. 아버님, 저희는 어찌 해야 합니까?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제 한 몸뚱이야 쓸 만한 것 있으면 빼어 주고 불살라서 납골이면 어떻고 산골인들 어떻겠습니까. 하오나 이것이 어찌 제 생각만으로 저지를 일이겠습니까. 차마 사뢰지 못할 말씀으로, 머지않아 성묘의 발길마저 끊어질 고향의 선영들을 도대체 어찌 해야 합니까?
이제는 친족들의 혈통 관리마저 어려워져 갑니다. 지금까지는 고향의 어른들이 계셨기에 방방곡곡의 일가들을 가보(家譜)로 묶을 수 있었지만, 이제 어느 현로인(賢勞人)이 있어서 지구 저편까지 퍼져나간 핏줄들을 챙기고 기록하겠습니까? 민족의 문화유산인 족보마저 선산 밑 고향마을과 함께 사라질 것이 명약관화합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약과라 할 만합니다. 앞으로는 호주제가 폐지되면서 자식이 제 어미의 성을 따를 수도 있게 된다 합니다. 김씨의 피붙이가 이씨의 혈육으로 둔갑을 하고 우리의 자손들이 생면부지 남의 후손으로 매김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형제 자매의 성이 갈라지니 사촌끼리 혼인을 한들 하등의 거리낌이 있을 리 없는 그런 세상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단군 이래의 풍요라고 너나없이 호언하는 오늘의 실태입니다. 아무리 선진화니 양성평등이니 하지만, 그래도 제 핏줄하나 건사하지 못하고서야 어찌 사람이라 할런지요? 눈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답답합니다. 제 앞에 밀어닥친 시절의 소용돌이가 원망스럽습니다.
아버님, 저의 어리광이 지나쳤나 봅니다. 부디 꾸짖어 주시고 괘념치는 마십시오. 남들이 하는 대로 눈치껏 지내다 보면 분명 새로운 질서야 생겨나지 않겠습니까. 하오나 아버님, 고향마을의 지난날들이 불현듯 그립습니다. 두견화 잔디벌에 아낙들의 화전(花煎)놀이. 복사꽃 시절이면 개울 건너 너럭바위 위의, 갓 쓴 어른들의 시회(詩會). 누이들의 추천(鞦韆:그네)과 장정들의 씨름판. 창포 잎 머리띠 두르고 온종일 쏘다니던 보리밭 종달새. 어느 것 하나 그립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더욱 그리운 것은 아버님의 두루마기 모습입니다. 아버님께서 장(場)거리에라도 나서신 날이면 저희 다섯 남매는 해질녘부터 동구 밖에서 아버님을 기다리곤 했었지요. 출타하신 어른을 집에서 마중하는 것은 자식의 도리가 아니었던 당시에는 겨울의 초저녁 추위쯤이야 아랑곳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밤 바람결이 꽤나 매서웠기에 발을 구르면서 손을 불고 있을 때면 어둠 저편에서 아버님이 나타나시곤 했습니다.
맨 처음의 모습은 언제나 아버님의 흰 무명 두루마기였습니다. 바람과 어둠을 솨아 솨아 쓸어내면서 성큼 성큼 다가오시는 아버님의 두루마기가 너무나 힘차고 멋있었습니다. 깃발처럼 휘날리는 아버님의 두루마기 자락 앞에 칼바람의 맹위조차 맥없이 부서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아버님의 흰 무명 두루마기는 우리 가문의 깃발인 동시에 가족들의 바람막이였습니다.
아버님의 그때 그 당당하신 모습이 무척 그립습니다. 불쾌하신 얼굴로 대문을 들어서시면서 “어흠” 잔기침을 하시면 버선발의 어머니가 댓돌 아래로 내려서며 몸을 숙이던, 그때 그 우람하시던 아버님의 권위가 새삼 그립습니다. 그때 동구 밖에서 큰 누나에게 건네주시던, 볏짚에 묶인 간잽이 고등어 두어 손이 어머니의 유일한 상차림감이었던 그 시절이 눈물 나게 그립습니다.
아버님 또 한 번 수다가 지나쳤습니다. 내내 명복을 누리시옵소서. 을유 세모에 고자(孤子)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