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없어진 옛 국영 해운회사에 근무하던 때였다.
부정기선(不定期船) 영업 부문의 정례 분석회의 겸 회식 자리에서였다. 간단한 질의와 토론이 끝나고 회식의 분위기가 익어 갈 즈음, 옆자리의 중역 한 분이 간곡한 눈짓을 보내 왔다. 오늘은 조금 일찍 일어날 테니 양해하라는 당부였다. 실은 아들내외가 집에 와 있는데 그들이 돌아가기 전에 귀가해야만 손자를 안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겨우 젖먹이인 손자가 그렇게도 좋으냐고 물었더니 기다렸다는 듯 그의 대답이 들떠 올랐다. 현관을 들어서는 자신에게 보행기를 밀면서 강아지처럼 달려들 손자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인 익살이 걸작이었다. 안고 있던 손자의 오줌이 자신의 아랫배로 뜨뜻이 적셔들 때의 흐뭇함이란 가히 오르가슴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약간은 계면쩍은 표정을 흘리면서 자리를 뜨자, 맞은편의 부장 하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람 하나 망그러지는 것이 바로 순간이라니깐.”
그의 지적이 조금 가혹하긴 했지만 나로서도 수긍하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지금껏 회사의 행사라면 모든 것에 앞세우던 그의 돌연한 변신이 너무나 놀라웠으므로…….
그로부터 한참 뒤, 직장 시절의 후배가 책 한 권을 들고 왔다. 자기 장인의 회혼식 기념문집이라 했다. 감청색 케이스와 표지로 견고하면서도 산뜻하게 장정된 사륙배판 본이었다. 그간 두어 번 뵌 바 있는, 정년퇴직 교장선생님의 깔끔하면서 꼬장꼬장한 외모를 여실하게 닮아 있었다.
한학이 깊으신 듯, 수많은 한문시와 고사들을 수록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혈통과 가문에의 긍지와 애착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사위들의 주선으로 생전처음 동남아 몇 나라를 둘러본 만시지탄의 감회에는 일생을 사도(師道)에만 전념해 온 노선비의 고고지정(孤高之情)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그러던 중, 눈에 잡히는 제목이 하나 있었다. ‘슬기로운 손자와 바보 할아버지’라 했다. 당신의 내외가 살고 있는 전원주택으로 다니러 온 손자가 한문 현판의 뜻을 묻는 것을 얼렁뚱땅 설명으로 돌려보내고 나서 이를 뉘우치며 손자에게 띄우는 글이었다.
지금껏 수삼 년 동안 그 현판의 의미를 묻기로는 나이 여섯인 당신의 손자가 단연 세 번째라고 추켜세우면서, 이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바탕이요 과학동(科學童)의 그릇이라 했다. 그럼에도 그것을 몰라본 할아비는 유례에도 없는 현문우답의 과오를 범하고 말았으니 손자의 넓은 도량으로 용서하라는 간청이었다.
손자를 떠나보낸 허전한 마음의 순간적 감상이기야 하겠지만, 평생을 대쪽처럼 살아 온 선비의 글이라기에는 어쩐지 격조를 벗어나는 것 같았다. 더구나 어린 손자의 단순한 호기심을 대학(大學)의 격물치지나 과학동에 비견시킨 과장은 근엄한 한학자의 분위기와도 사뭇 동떨어지는 것이어서, 이야말로 현문우답을 능가하는 실책이 아닌가 하고 실소치 않을 수가 없었다. 불가사의도 유만부동이라 여기면서…….
그로부터 또 한참 후, 이번에는 내가 손자를 보게 되면서 일련의 사태들이 본성을 벗어나고 있었다. 갓 낳은 강아지처럼 눈꺼풀만 깜작이는 핏덩이를 향한 정체 모를 인력이 나를 자꾸 산부인과와 조리원으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젊은 산모들의 눈치를 감안한 듯, 아내가 자제를 당부해 왔지만 맘대로 되지 않았다.
손자가 백일을 갓 지난 때였다. 주말이라고 안겨 온 녀석을 유모차에 태우고 아파트 단지 내의 공원으로 나갔더니 키 작은 단풍나무 한 그루가 유독 진하게 물들어 있었다. 가지를 흔들자, 단풍잎들이 우르르 떨어지면서 손자 놈이 방싯방싯 웃었다. 그러는 중에 관리인이 달려와서 따졌다. 알 만한 분이 도대체 무슨 짓이냐고……. 어린 손자에게 먼지를 뒤집어 씌워서는 또 어쩌자는 거냐면서…….
한 마디 대꾸도 못한 채 오롯이 당하고 보니 어처구니없었던 내 행위가 너무나 부끄러웠다. 어린 나무를 흔들어댄 것도 그렇지만, 손자의 안면에다 매연을 뿌려댄 일은 제정신의 짓거리가 아니었다. 주위의 눈총들을 피하면서 집으로 잰걸음 하는 중에도 녀석은 방싯거리고 있었다. 마치 정신 나간 할아비를 놀리기라도 하는 듯, 그러나 더없이 귀여운 모습으로…….
주말이면 업혀 와서 하루 이틀씩 같이 지내곤 하던 손자 놈이 어느새 첫돌을 지난 때였다. 내가 깜박 졸고 있는 사이, 녀석은 제 할머니 화장대에서 유리병 하나를 집어 들고 거실로 나서고 있었다. 필시 베란다 바닥에 내동댕이칠 것이기에 화들짝 일어나서 따라 나갔더니 거실에는 달빛만 가득할 뿐, 손자 놈의 모습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각은 녀석이 떠난 지 다섯 시간도 넘는 새벽 세시였고 나는 잠옷 바람이었다. 심한 허탈감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이제는 손자 놈의 환영에까지 휘둘리는 내가 중증임에 틀림없었다.
손자가 태어나던 날부터 알게 모르게 야금야금 진척된 병증이었다. 가끔의 자각증세와 이에 따른 경계가 없지도 않았건만, 사뭇 맹목적인 애착의 기세 앞에서는 도무지 무용이었다. 어느 주말에 자식 내외가 못 온다고 하면, “그래, 오랜만의 내 시간이야.” 하다가도 그들이 일정을 바꾸어서 오겠다고 통보해 오면,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무릎을 치게 되는 내 모습이 한심스럽다 못해 서글프기까지 한 것이었다.
분명 미혹에의 집착이요 그로 인한 진로(塵勞)며 번뇌이리라. 나 같은 무지렁이 중생의 필연적 자아발견이자 이로 인한 비애이기도 하리라. 그러나 벗어날 방도가 없으니 고개 숙이고 죽어지낼 밖에. 나 또한 예외 없는 속물임을 자복하면서…….
우연한 기회에 글 한 편을 읽게 되었다. 구한 말 안동지방의 명망 높은 선비의 이야기였다.
상투를 자른 하이칼라 차림으로 귀성 차 내려온 아들에게 절연을 선언하고는 대문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그로부터 며칠 뒤, 부엌을 드나들다가 발각된 며느리에게 너는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며느리가 그 자리에 엎드려 읍소했다. 남편이야 용렬한 나머지 효의 근본을 그르쳤지만 자신은 변함없는 종부(宗婦)이오니 거두어 주십사고……. 그러나 그는 들은체하지 않았다. 지아비의 훼절을 목숨으로 막지 못한 지어미의 죄 또한 가볍지 않다면서 며느리의 발길마저 엄금시켰다.
몇 년 후,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자가 내려와서 할아버지에게 절을 올렸다. 그러자 그는 손자를 가까이 불러 앉히고는 까까머리가 춥지 않으냐고 애석해 했다. 조바심을 하며 지켜보던 이웃들이 마음을 놓으면서 물었다. 똑같이 머리를 깎았건만, 아들과 손자를 달리 대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연유냐고…….
그러자 그가 진중(鎭重)을 차리면서 대답했다. 당신을 거역해서 상투를 자른 아들놈의 불효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지만, 제 아비의 뜻을 좇아 머리를 깎은 손자의 효행이야 기특하지 않으냐면서…….
바로 그것이었다. 그만한 지사(志士)들마저 손자 앞에서는 어김없이 곤두박질을 치게 마련이라면, 손자와 할아버지의 관계라는 것이 원래부터 그렇게 돼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꼭 그렇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천륜에 천륜을 곱한 두께와 강도(强度)로 형성되어 있어서, 웬만한 이론의 잣대로는 가늠조차 가당찮을 터였다. 이야말로 정답인 동시에 장님의 개안이요 미몽의 돈오였다.
그로부터 손자는 한 떨기의 꽃이었다. 격의 없이 해맑은 환희의 꽃이었다. 꺼질 듯 보드라운 정적(靜寂)인 동시에 맑고 향기로운 ‘사랑의 호심(湖心)’이었다. 그래서 나는 하늘 아래 둘 없는 존재도 손자 앞에서는 나가떨어지는 것이라고, 손자 앞에서조차 허물어질 줄 모른다면 사람도 아니라면서 호언까지 하는 것이었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황홀의 시간, 그것의 길고 짧음 같은 것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