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대장(百人隊長) (36화)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대의 해운회사였지만, 은행관리의 족쇄가 채워지자 그 처신과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오백 명도 넘는 본사의 직원들이 일체의 직무권한을 박탈당한 채 눈만 껌벅이는 식물인간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거기에 해운업의 지식이 전무한 관리요원들의 전횡을 수긍해야 하는 수모였다.

오래 전에 선물시장에서 확보해 둔 미국산 곡물을 운송하기 위해 외국의 배를 빌리겠다는 계획서를 올렸더니 책임 관리인이 결재를 거부했다. 적지도 않은 선급금이 들어간다는 이유였다. 자기들은 빌려준 돈을 회수하러 왔지, 투자하러 나온 것이 아니라면서 막무가내였다.

곧바로 선급금의 몇 배가 들어올 일을 외면하는 것은 회수의 방법도 아니거니와 해운의 관례상 계약불이행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설명했더니, 대답이 궁해진 그가 도리어 발끈했다. 국민 앞에 죄를 지은 주제에 말이 많다면서 욱질러들었다. 이에야 나도 흥분치 않을 수는 없어서 쏘아붙였다.

내가 국민 앞에 죄인이라면 무턱대고 수천억 원을 빌려준 은행은 민족의 무엇이냐고. 이웃 나라에서는 은행원들이 대출회사의 최고경영자를 미행하면서까지 그의 경영능력과 도덕성을 참작해서 대출규모를 조절한다던데 당신네들도 그렇게 했느냐고. 의당 언성이 높아지면서 한바탕의 소동이 뒤따랐다.

그때 그는 시저의 갈리아 군단의 백인대장을 아느냐고 물었다. 부도회사의 영업부장이라면 족히 전투에 패한 백인대장에 해당된다고 했다. 자결 아니면 복종의 선택뿐인 패전 백인대장의 처지를 내게 빗댄 것이었으리라.

그들과의 갈등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대면 초기의 기 싸움 같은 으르렁거림이 지나자, 이내 서로의 위치로 한 걸음 물러설 수 있었다. 당시 대기업 부도의 대부분은 경제가 아닌 정치의 산물임을 우리들 모두가 대충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가끔은 퇴근 후의 술자리도 함께하는 사이로 발전해 갔다.

그러나 결코 대등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점령군(?)으로서 평정작업을 주도했고 우리들은 그들의 지휘에 순응해야 했다. 모든 기안서류에는 그들의 협조서명이 있어야 했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자주(自主)도 긴장도 없는 무위의 평화 속으로 길들여져 갔다. 저마다 부도회사의 요원이라는 평가절하의 주홍글씨를 가슴에 단 채.

난생처음 누리는 정시 출퇴근이 어색했다. 별을 보며 출입하던 아파트를 태양을 이고 드나들자니 경비원 보기에 민망스러웠다. 아침저녁 마주치는 이십여 부원들의 목례가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어쩔 도리는 없었다. 부끄럽고 불안하더라도 그냥 그대로 지내는 수밖에. 이 또한 쉽게 익숙해진다는 이치를 조금씩 터득해 가면서.

그렇게 여섯 달을 지냈을 때였다. 회사를 인수해 갈 업체의 명단들이 떠오르면서 이제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시한이 조여들고 있었다.

▲ 한국, 인도네시아 해운동맹 창립을 위한 예비회의에서 인사 (한국선주협회 사무실)

회사의 규모나 연륜이 절반도 못되는 또 다른 점령군 앞에 다시 또 패전 백인대장으로 서고 싶지는 않았다. 은행의 편의로만 작성된 입양절차에 양순한 패잔병으로 편승해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야 결단을 내리는 것이 최소한의 자존이며 지금껏 부서장으로 재직해 온 조직에의 체면이리라 했다.

초등학교 아니면 기껏 중학교에나 다닐 아이들을 생각해서 신중해야 한다는 동료 부장들의 충고도 있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들이 자식들의 뒷일까지 걱정하는 반면 나는 내 자신의 문제로도 힘겨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을 원망하거나 그들에게 내 의향을 권할 이치는 아니었다. 그들의 충고 또한 나와 다르지 않은 그들의, 동병에의 상련이요 그들 나름 고뇌의 발로(發露)였을 테니깐.

오히려 은행 관리역의 호의가 고마웠다. 그간 나의 옆자리에서 응접탁자를 같이 쓰면서 서로 다른 위치에서나마 인간적인 이해를 견지해온 담당 관리역이 나를 만류하고 나섰다. 이제 곧 은행이 주도하는 인사발령이 있을 것이며, 내게도 좋은 소식이 있지 않겠느냐면서 자중을 당부해 왔다.

그러나 이 또한 수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새삼 은행의 시혜를 구걸할 일도 없거니와, 그가 알려준 내 신상의 노림수를 모르는 듯 도모할 수는 더욱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바로 대꾸했다. 내가 은행의 발령으로 중역이 된다면, 일본의 작위를 받았던 구한말의 대신들과 다를 것이 뭐냐고……

비유에도, 예의에도 돼먹지 못한 객기이긴 했지만 그의 우의만은 취중에도 고마웠다. 그해 늦가을, 봄부터 밀린 예비군 훈련을 근교의 교육장에서 때워 마치던 날, 그와 내가 북창동의 어느 주점에서 어울렸던 저녁이었다.

이제는 내 삶의 주인으로 살고 싶었다. 핏기 없는 얼굴에 넥타이를 졸라맨 평균 모습으로 지향도 없이 내달리던 쳇바퀴를 이참에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하여 쪼들리고 힘들더라도 절실하게 살아보고 싶었다. 그러면 훗날의 자식들도 오늘의 내 선택을 이해하리라 믿었다. 앞으로의 모든 고난은 내 자존의 대가이며 그것은 아무리 무거워도 싸게 먹히는 셈이라고 다짐했다. 그리 늦지 않은 시간에 부여받은 전환의 계기는 차라리 축복이라는 판단이었다.

이제 머뭇거릴 이치는 없었다. 회사의 새로운 주인이 등장하기 전에 떠나야만 했다. 훗날, 만에 하나라도 내가 그들로부터 배척당했다는 불명예의 소지는 남기지 말아야 했으므로……

마흔한 살의 혈기였다. 그러나 겨우내 새벽마다 남한산성의 시린 눈밭을 밟으면서 고뇌한 결론이었다.

여수의 오동도 동백이 마침 한물이라 했다. 포항의 물미역에 봄 냄새가 여물었단다. 목포에는 유달산자락에 옛날식 기생주점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했다. 내가 사직서를 제출한 내막도 모르는 항구의 대리점 사장들이 나의 방문을 재촉하고 있었다.

지금껏 친밀했던 그들과도 찾아가서 작별을 고해야 했다. 이참에 서로 엇갈리면 언제 어느 하늘가에서 구름 아니면 바람으로나 스칠까 모를 인연들이 아까웠다. 그리고 나 또한 당분간은 서울을 벗어나서 지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