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봄날에 동무들과/ 백제의 옛 서울 찾았더니/ 무심한 구름이 오락가락/ 바람은 고요히 부는구나
어린 날, 누나들을 따라다니면서 귀동냥으로 익힌 노래다.
앞산이 이마를 칠 듯 가까운 두메마을이었다. 사월이면 뼘 자란 보리밭 물결 위로 노고지리가 울었다. 지리지리 지리리 지리리리 지지리……. 아직 초등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은 소년은 고개를 젖혀 들고 하늘 속을 뒤져 보지만, 밝은 하늘빛에 눈만 부실 뿐 노고지리는 보이지 않았다. 텅 빈 마당과 뜰이 새삼 심심했지만 학교에서 돌아올 누나들이나 기다릴 수밖에…….
자수판(刺繡板)을 싸 들고 다니는 큰누나는 만만하지 않았다. 자연 둘째 누나를 따라 나서는 일이 잦았다. 달래, 냉이, 씀바귀를 캐 담으면서 밭둑길을 지나고 개울을 넘나드는 누나와 누나의 친구들을 장거리의 강아지처럼 따라다녔다.
마을이 보이지 않는 골짜기로 접어들면 누나들은 호미와 바구니를 밀어 둔 채 산기슭 잔디밭으로 모여 앉았다. 그러고는 시간 가는 것도 잊은 채, 참새 떼처럼 재잘거렸다. 스스럼도 없이 벌렁 드러눕거나 뒹굴기도 하고 무슨 남자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킬킬거리기도 했다. 그러면 소년은 슬며시 골 안으로 들어가서 찔레 순을 꺾고 삘기를 뽑았다.
그러고도 심심하면 보릿대궁으로 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그럴 때면 누나들이 합창하는 백제의 옛 서울 노래가 계곡 아래쪽에서 아스라이 울려 왔고 파란 하늘을 가로지르는 노고지리의 울음도 연거푸 들려왔다. 그러나 노고지리는 끝내 보이지 않았고 골짜기 가득 자란 보리밭 초록 물결만 강물처럼 넘실거렸다.
지난 오월에도 하늘빛이 푸르렀고, 한강 고수부지의 훤칠한 보릿대들이 강바람에 출렁이고 있었다. 문득 부여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마침 석탄일이 월요일인 연휴가 멀지 않았다.
자그마한 읍마을이 보릿펄에 싸여 있었다. 촌리(村里)처럼 잠잠한 시가지가 백제의 도읍터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성급한 선입견의 오류려니 하면서 낮은 거리를 헤쳐 들었다. 마침 부소산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나타났으므로 우측으로 산을 찾으면서 차를 몰았다. 그러나 산은 끝내 보이지 않았고 찻길은 강기슭에서 끝나 있었다.
무엇에 홀린 듯 두리번거리는 내게, 부소산을 지나쳐 왔다고 누가 일러 주었다. 오던 길을 되짚어 나오면서 부소산을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라 좌회전을 했을 때도 그곳에는 산이 없었다. 부소산 초입임을 알리는 매표소가 덩그러니 앞을 막고 있을 따름이었다.
인근에 숙소를 정한 뒤, 조급한 마음으로 다시 마주한 부소는 도무지 산이라 할 만하지 않았다. 야트막한 구릉 위의 높지 않은 교목림이었다. 적이 당혹스러웠지만, 그것은 초입의 정경일 따름이려니 했다. 굽이굽이 산성을 따라 오르다 보면 경주의 남산이나 토함산의 그것 같은 부소산 진면목이 우뚝하게 다가서리라 여겼다.
정문인 사비문(泗沘門)을 들어섰을 때는 태양이 마지막 반나절로 기울어져 있었다. 우선은 개략적인 지형만을 둘러보기로 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본격적인 관찰은 이튿날의 후속 일행들과 함께 하기로 되어 있었고, 낙화암을 감아 흐르는 백마강 푸른 물줄기를 한시 빨리 보고 싶었다.
그러나 부소는 그것뿐이었다. 사비문에서 올려다 보이는 것이 전부였다. 아무리 늘려 잡아도 한 시간이면 족한, 강기슭 평원 위에 줄기도 없이 외톨로 앉은, 해발 백 미터나 될까 말까한 작고 낮은 동산이었다. 그러자니 낙화암이 천인단애(千仞斷崖) 일 리 없고, 좁은 백마강에는 돛단배가 떠 있지도 않았다.
다음날에 찬찬히 둘러본 부소산 유적들도 허전하기만 했다. 삼충사에서 사자루까지, 근래에 신축되었거나 다른 곳에서 옮겨다 지은 누각들이 하나같은 콘크리트 지대(址臺) 위에서 엉거주춤 생소했다.
낙화암과 백마강도 삼천궁녀의 전설을 담기에는 옹색하기 짝이 없었다. 오후에 살펴볼 시내의 유적들이나 기대하면서 깊지도 넓지도 않은 백마강을 발동 유람선으로 타 내렸다. 마침 남중(南中)으로 치닫는 태양열 탓인가 목이 말라 왔다.
정림사지(定林寺址)의 오층석탑이 정교한 듯, 장중한 듯, 밝은 햇살 아래서 반듯했다. 그러나 풀 한 포기 없이 드넓은 빈터에 제 그림자만 데리고 선 석탑의 자태가 선연해서 애잔했다. 거기에 탑신 가득히 새겨져 있는 소정방의 승전기공문이 치욕스런 역사의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인 양 처연감(悽然感)을 덧씌우고 있었다.
궁남지(宮南池)에 이르렀을 때도 태양은 아직 중천에 걸려 있었다. 사비정궁의 남쪽 이궁, 포룡정(抱龍停)이 있어서 무왕의 탄생지로 전하는 그곳에 궁궐의 흔적은 가늠할 길이 없고, 만여 평의 인공연못 주위로 버들 숲만 무성했다. 경주의 안압지보다 먼저 조성되어 신라와 일본의 조원(造苑)문화를 선도했다는 당시의 궁원지(宮苑池)가 지금은 농수로(農水路)의 일부인 양, 보릿펄 속에 묻혀 있었다.
적막한 무심이 힘에 겨운 나그네가 도리어 태연한 기념품점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이곳이 백제의 무왕 서동의 출생지가 맞느냐고…….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더더욱 무심했다.
“도대체 언눔이 그걸 안대유?”
구드래 나루의 저녁 강바람이 서늘했다. 그러나 마음은 바람처럼 가볍지 않았다. 소정방이 자신의 흰 말을 미끼로 용을 낚았대서 백마강이요 조룡대라 했다. 낙화암 기슭에서 자생하던 고란(皐蘭)을 찾아낸 것도 하필이면 신라의 원효라 한다.
부여에는 백제가 희박했다. 연대만 뚜렷했지 자취의 흔적은 드물었다. 그나마의 유적들조차 빈약하고 허술해서 마음을 붙이기가 쉽지 않았다. 사비백제의 일백이십여 년이 너무 짧았던 것인가. 아니면 나당군의 분쇄작전이 지나치게 가혹했던 탓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늘에는 있을 법한 관광지로서의 면모나 고도(古都)에의 애착 같은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공연한 노릇인 줄 알면서도 포장 주점 안주인에게 말을 붙여 보았다. 이곳 출신 국회의원은 수십 년래의 실력자인데 부여가 왜 이리도 한적하기만 하냐고……. 그랬더니 또다시 심중 모를 대답이 바람결에 실려 왔다.
“그 양반이야 나라의 국회의원이지 어디 부여의 국회의원이던감유?”
귀로에 들른 박물관이 닫혀 있었다. 석탄일 휴무인 듯, 쇠그물 정문에 큼직한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아무리 연휴이긴 하지만 그래도 관광지임에, 월요일에는 문을 열리라던 내가 한심스러워지면서 등줄기엔 땀이 솟아올랐다.
황룡사 구층탑의 아비지, 다보탑과 석가탑을 다듬었던 그의 후손 아사달, 찬란했던 여명의 휘황한 광채를 본토에서 보리라던 나의 기대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망집이었다. 그것은 또 다른 무영탑의 그림자인 양, 어린 시절의 푸른 하늘 속 노고지리인 양, 영 내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쩌면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무슨 신비 같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공주의 무령왕릉을 돌아 나왔을 때도 갈증은 식어들지 않았다. ‘목이 메는 백강 하류’ ‘동학년 곰나루’에도 보릿펄만 옛 것인 양 짙푸르렀다. 무심한 구름이 오락가락할 뿐 바람은 고요히 불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