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나가는 말로 친구들에게 말했다.
“명훈이가 등록을 할 수 없으니, 너희들 다방, 술집에 뿌리는 돈으로 좀 도와라.”라고 말하니 친구들이 선뜻 돕겠다고 호응한다.
‘너는 얼마, 너는 얼마.’ 나는 찬조하겠다는 액수를 적었다. 수업시간이면 ‘........ 저 친구는 얼마 내겠다고 했는데......’ 나는 찬조하겠다고 약속한 명단만 쳐다보느라고 학과에 집중이 안된다. 그렇다고 내가 맡긴 돈도 아닌데 독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벙어리 냉가슴 앓는 꼴이다.
방학은 다가오는데 돈은 모이지 않아 애가 탄다. 이런 마음을 누가 알까? 오늘이면 종강인데, 성의를 보이겠다는 친구들은 무사태평이다.
“...... 육시럴 놈들, 이놈들아 돈 좀 내라!. 돈 좀......”
속으로 절하건만 묵묵부답이다.
‘....... 명훈아 어떻게 하면 좋니.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모금운동은 명훈이가 눈치 채지 못하게 극비리에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
방학동안에 백방으로 뛰어보았으나 뾰족한 수가 없다. 내 등록금을 내고 남은 돈을 몽땅 털어 봐도 턱없이 모자란다. 오늘 17시면 등록 마감이다. 잭깍 짹깍 시계소리가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다급해졌다. 한익이가 직공으로 있는 구둣가게로 달려갔다. 사정이 급함을 들은 가게 주인이 선뜻 융통해준다. 한익이 가게 주인은 자상하고 후덕한 분이다.
없는 돈에 택시를 타고 ‘빨리 빨리’ 마음이 조급하다. 고려대는 등록마감 시간이 넘으면 문을 탁 닫아버린다. 오늘날처럼 분납이나, 등록마감일의 연기가 없다. 등록마감시간에 1초라도 넘기면 자동으로 퇴학이다. 가까스로 등록을 마쳤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명훈아 내가 해냈어!” 눈물 많은 나는 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줄초상이 난 듯한 명훈이네 집으로 발걸음도 가볍게 달려갔다. “명훈아, 등록 끝냈어!” 나는 영수증을 내밀었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놀라 안방에서 뛰어나와 우리는 얼싸안고 펄떡펄떡 뛰었다. 명훈이는 장교로 임관되어 복무를 마치고 고등학교 교사로 봉직하다가 퇴임했다.
우리보다 늦게 입대한 해룡이가 휴가를 나왔다. 전화도 귀하던 때라 해룡이와 나는 왕십리 명훈이를 찾아갔다. 마당으로 들어선 우리는 너무 반가워 서로 얼싸안고 환호성을 지르며 펄쩍펄쩍 뛰었다. 이 광경을 방에서 지켜본 경림이 엄마(당시는 친구의 애인)는 지금도 그때 우리의 우정을 회상하며 자주 말한다.
친구는 음악에 심취하여 CD 천여 장, 음악전문서, 음악잡지가 서가를 장식한다. 외국에 가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오디오부품을 구입하고는 몸소 깎고 자르고 하여 오디오를 손수 조립한다. 서재는 온통 오디오시스템이다. 배가 박사학위를 받기 위하여 학비로 들어간 돈보다 훨씬 많이 들었겠다.
아빠를 닮아 경림이는 음대를 졸업하고 음악가인 남편과 독일에 유학하고 돌아왔다. 절찬리에 부부음악회를 자주 개최한다. 깜짝 놀랄 일이 있다. 딸과 사위의 음악합주회에 직접 아버지가 연주음악의 해설을 하는가 하면, 콘서트홀에서 음악해설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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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 70년대 고려대학교 교정 [출처 ;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페이스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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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훈이는 음악동호인, 산악회원들과 테마여행을 잘 한다. 사찰을 탐방할 때면 사전에 인터넷에 조사하여 철저히 탐사한다. 아니면 음악이 있는 곳만 조사하여 탐방한다. 나는 명훈이와 해룡이가 더없이 부럽다. 자기 건강을 위하여, 취미를 위하여, 탐구를 위하여 여가를 선용한다. 나는 서재에 틀어박혀 ‘낱말밭’연구만 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삼총사 중에 가장 인기 없는 남편이 바로 나다 .
명훈이와 익순이는 대학동기들을 잘 이끌어 동창회가 활성화 되었다. 참으로 헌신적인 일꾼들이다. 이들이 회장, 총무를 사임하면 동창회가 깨어질 것 같아 우리 동기동창들은 계속 유임시킨다. 당사자들에게 몹시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우리 삼총사는 때때로 부부동반으로 여행도 한다. 그런데 백수들이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5년 전에 여행계획을 세워놓고 실천을 못하고 있다. 올해는 실천하려나? 이는 나 혼자의 희망일 뿐이다 .
친구는 조촐하고 아담한 음악학원을 인수하여 원장이 되어 더욱 바빠졌다. 음악학원 원장이니 얼마나 바쁘겠는가? 그러니 우리 삼총사가 만나기 더욱 어려워진 것이다.
논산훈련소 입대
1963년 나는 대학을 졸업은 하였으나 군대 미필자는 취직원서도 낼 수 없어 빨리 군복무를 마쳐야 했다. 그러나 구청 병무과에 뇌물을 주지 않으면 자원입대가 어려웠다. 몽땅 썩은 세상이다. 국가에 헌신하는데도 뇌물을 주어야 하는 세상이다.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재학 중에 군대에 자원했지만 내가 재학 중에 입대한다면 이것은 곧 학업의 중단이나 같다. 나의 지상과제는 대학의 졸업이었다.
대학졸업자 우선입대라는 방송을 듣고 병무청에 가서 지원서를 냈다. 일련번호가 95번이다. 지원자가 많아 이번에 입대하는 자의 여부는 불확실하니 4월 12일 한양대 노천극장에 나와보라고 한다. 주머니에 단돈 500원을 넣고 갔더니 지원자 전원 입대이다. 치약과 칫솔만 사들고 논산훈련소로 갔다.
수송열차가 막 떠난 후에 내 여자친구(현 아내)는 행여나 하고 달려왔다가 이미 논산으로 떠났다는 말을 듣고 전송 나왔던 친구 명훈이를 붙들고 평펑 눈물을 쏟더라고 전한다.
훈련소 수용연대에서 신체검사를 하고 합격해야 머리를 박박 깎고 논산훈련소로 입소한다. 체중을 재는 측정관이 “요것 봐라? 너 이리로 나와. 여기에 올라서봐.” 파운드 저울이다. 환산표를 보더니 “0.16 오버, 합격!” 하고 외친다.
일반 저울은 정확치 못했던 모양이다. 체중이 45kg이하면 불합격이나 내 체중은 45.16kg이었다. 합격자들은 모두 삭발하여 까까중이 되어 서로 합장배례를 하며 웃었다.
훈련소에 입소하기 위하여 빨래를 하였는지 아직 마르지도 않은 내복과 군복을 입으라고 한다. 축축한 내복을 보니 허연이가 더덕더덕 붙어 있다. 모두들 입지 못하고 죽을상이다. 조교가 몽둥이를 휘둘러 급히 입었다.
축축한 내의의 이는 얼마나 굶었는지 뜨끔뜨끔 물어댄다. 이가 징그러워 머리끝이 쭈뼛쭈뼛 솟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