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오기도 못되는 무지의 객기임을 내가 알고 있어..
수필가, 한일상선 대표 김문호 "우리가 청년이었을 때" (15화)
천구백칠십사 년 삼월, 나는 대한해운공사 소속 세종호의 일등항해사였다.  미국 플로리다 주의 잭슨빌에서 칼륨(Potassium) 만 팔천 톤을 싣고 인천으로 항해 중이었다.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기 위해 카리브 해 쪽으로 침로를 바꾸려는 순간, 본사의 전문이 ...
前 서울대의대교수, 고려대 구로병원장, 서울아산병원장 민병철 "청진기 의사 컴퓨터 의사" (57화)
옛날 서부활극에 등장하는 작은 마을의 의사는 환자에게 의사인 것은 물론, 인생살이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상담사가 되어준, 마을에서는 존경받는 장로 같은 존재였다. 이런 영화 속 시골의사의 모습이 지금 우리가 본받아야 할 상이 아니겠는가! 전문적인 ...
전주교구 원로신부(전주 금암성당 주임신부 역임) 서석구 "고향에 집을 짓고" (50화)
고향에 집을 짓고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적인 당면과제가 있다면 의(衣), 식(食), 주(宙)일 것이다. 첫째는 ‘식’이요, 둘째는 ‘의’요, 셋째는 ‘주’일 것이다.  우리가 성장해서 결혼하게 되고 자녀를 낳아 독립하게 되면 집을 소유하고...
김화내과의원 대표원장, 수필가 김화숙 "두 며느리 인사오던 날" (15화)
벌써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내가 시댁에 처음 인사 가던 날 남편이 “이 집 맏며느리 인사 왔습니다.” 하고 큰소리로 외치던 생각이 난다. 그때 훤칠하신 시아버지가 거실로 나오셔서 “그래 잘 왔다. 어서 들어오렴.” 하고 반갑게 맞이하던 때가 엊그제 같...
前 동국대 교수, 동국대 부총장 최상범 "우리 고장의 주요 문화유산" (85화)
가운리 고인돌 전시장    남양주 고인돌이 가운리, 삼패리, 지금리, 금남리, 진중리 등 다섯 군데에서 발견되었으나, 거의 훼손되거나 수중으로 묻히게 되었다.  그 중에서 교통이 편리하고 접근이 용이한 곳은 가운리에 남아 있는 고인돌이다. 남...
前 예술의전당 사장, 세종문화회관 사장, 단국대석좌교수 이종덕 "싸나이라 부르고 싶은 그 사람" (16)
차범석 (극작가) 이종덕 씨의, 아명은 ‘쫀득이’였다.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왔으니 말투에 아직 일본말 투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얘기를 뒤늦게 들었을 때 ‘쫀득이다’라는 형용사가 떠올랐다. 음식을 먹을 때 쫀득거린...
한국소형영화협회 회장, UNICA 한국본부장 장찬주 "연재를 마치고"
지난밤 꿈을 꾸었다. 고향 마을 금곡천에서 어린 시절 벗들과 벌거숭이 꼴을 한 채 한껏 신이나 멱을 감는 꿈이었다. 초여름 아스라한 미풍에 청보리가 춤추고 멀리 매미 소리가 들리던 평화로운 꿈이었다. 그 여운이 하루 종일 마음에 따스하게 남아 있다. ‘...
한미연합사 부참모장, 예비역 육군중장 차기문 "영원한 삶을 위한 리더십 요체"
무욕즉강(無慾即强), 욕심을 버리면 그것이 바로 강하게 되는 것이다. 욕심을 버려라. 바둑을 둘 때 대단히 유리한 국면에서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역전되는 경우가 많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
前 호주 CLAY&CERAMICS 회사 연구소장, 중앙대 교수 임남웅 "교수로 임용되어 16년 여 강단에 서고" (70화)
1992년 3월 첫 주에 나는 첫 수업을 시작했다. 아직도 교수가 아닌 교수자격으로 교단에 섰지만, 마치 내가 전임교수인 걸로 착각될 만큼 열과 성의를 다해 강의했다. 오랜만에, 그것도 20여 년 만에 강의를 하니 모르는 것도 많고 사실 자료도 없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디트로이트 머시 대힉교 국제금융학 교수 김석희 "연재를 마치며"
떠나온 고향으로 가고파 금의환향하겠다고 나 자신에게 굳은 약속을 하고 고향 반곡리를 떠난 지도 덧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어느덧 60년이 흘러갔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고향은 바로 그리움이다. 나를 비롯해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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